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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 게재할 용어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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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3-24 10:28 조회1,1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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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 게재할 용어의 이해 (자(字)와, 시명(時名)에 대한 설명)

 

1) 자(字)의 유래

관례(冠禮) :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을 말한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데에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다.

고대 중국의 유교 의례를 정리한 경전인 《의례(儀禮)》17편의 제1편이 관례의 절차를 다룬 「사관례(士冠禮)」인 것에서 관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관례」에 따르면 「원복」의 「원(元)」은 「머리」, 「복」은 「착용하다」의 뜻으로, 머리에 관을 쓰는 것을 의미했다.

 

관례: 사대부의 관례는 나이 20세에 이루어졌는데, 반드시 그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복상(服喪)이 없는 경우라야 했으며, 대공(大功)의 복일지라도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관례를 거행하지 못했다. 일자는 고대에는 길일을 택했던 것과는 달리 정월의 어느 하루를 정하여 관례를 행하도록 했으며, 관례는 보통 조묘(祖廟), 즉 집안의 사당에서 거행하였는데, 관례를 행하는 자도 《논어》·《효경》에 밝고 예의를 대강 안 연후 행하곤 하였다.

계례(?禮): 계례는 남자의 성인식인 관례에 대해 여자가 행하는 성인식이었다...

혼례 때 여자가 쪽을 찌어 올리고 비녀를 꽂는 의례.

내용: 관례가 남자의 머리를 빗어올려 상투를 틀고 관모를 쓰는 의식임에 비해, 계례는 여자의 의례로, 모두가 성인이 되었음을 뜻하는 의례이다. 『사례편람』에 여자가 혼인을 정하면 계례를 행한다 하였고, 혼인을 정하지 않았어도 여자가 15세가 되면 계례를 행한다고 하였다.

계례에는 어머니가 중심이 되고, 친척 중에서 어질고 예법을 아는 부인을 주례로 삼아 사흘 전에 청한다. 당일이 되면 날이 밝는 대로 의복을 준비하고 차례대로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례가 도착하면 주부가 나아가 맞아들인다.

주례가 계례자에게 비녀를 꽂아주면 방으로 가서 배자(背子)를 입는다. 이어 간단한 예를 올리고, 주례가 계례자에게 자(字)를 지어준다. 주인은 계례자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 고한 다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명(時名): 시명의 설명은 별도로 자료를 발견할 수가 없다 다만 아래의 자료를 참조바람.

지식백과:

①최규서[崔奎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사 > 조선시대사 이 때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時名)을 얻어 언관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서북인을 통청(通淸)하라.”는 왕의 하

시명(時名)을 떨쳤을 뿐 아니라 기지(機智)도 뛰어나 세 사람의 어느 선비들이 시비(是非)하며 서로 다투는 것을 벽(壁) 뒤에서 엿듣고 그 시비 장단 공절(是非長短曲折)...

 

※ 근대에 와서 족보 발간 내용 중에 시명(時名)이라고 게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시명(時名)에 대한 명확한 근원이나 설명을 첨언하지 않고 게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오기가 아닌가 싶다.

 

시호 [諡號]

1) 예전에, 임금이나 정승,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

 

諡號: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혹은 전대 군주가 죽은 다음에 후대 군주가 선대에 올리는 호칭. 죽은 이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한 호칭이다.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들에는 모두 엄격한 의미가 정해져 있다.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는 시법을 참조.

군주의 시호는 ××왕 또는 ××제(××황제)가 되며, 신료는 그 봉작에 맞춰 ××공, ××후가 된다. 다만 ××왕이라고 해서 모두 시호는 아니다. 시호가 사용되기 이전의 왕이나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군주는 대부분 시호를 붙여줄 사람이 없어서 시호가 없이 이름 + 왕의 형태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보장왕이나 백제 의자왕의 경우가 대표적.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서는 양(煬)자를 피하는 게 대부분인데, 황제라는 호칭이 생긴 이후부터는 이 양자가 최악의 폭군에게 붙이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좋지 않은 시호로는 영(靈)과 여(?)가 있다. 영 같은 경우는 최악의 암군이란 뜻이고, 여 같은 경우는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단 뜻. 양자가 들어간 최악의 암군의 대표격으로는 수나라의 양제가 있으며, 영자가 들어간 군주로는 초나라의 영왕, 진나라의 영공, 후한의 영제 등이 있다. 여자가 들어간 군주 중에는 주나라의 여왕이 있다.

 

폭군이거나 신하들에 의해 재위 중에 폐위된 군주에게는 시법을 적용하지 않고 '폐(廢)' 자를 넣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삼국시대 위의 폐제 조방과 조모, 남북조시대 유송의 전폐제, 후폐제 발해의 폐왕 대원의 등.

 

한국의 경우, 신라 법흥왕이 아버지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를 올린 것이 최초의 시호 기록이다. 이 지증왕의 대부터 국왕의 칭호를 왕(王)으로 고정하고 2글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신라가 935년 고려에 귀순하면서 멸망한 뒤 시호 제도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에서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시호는 왕, 왕족, 공신, 명신에게 내려지는 명예 칭호로 자리매김한다.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세력이 주축이 되어 건국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호는 더욱 세밀해지고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시호에는 종래의 시호 제도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된 왕에게 폐(廢)라는 글자를 내리는 대신 왕위에 오르기 전의 신분인 군(君)의 작호로 호칭하는 것이었다. 이 작호로 격하된 조선의 왕은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의 3명이다. 그나마 노산군은 19대 숙종 24년(1698년)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고 단종(端宗)으로 추시되면서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으므로 이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작호로 불린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물론 시호상으로 폐(廢)라는 글자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후 임금들의 세대에서 폐주(廢主)라고 불리었다. 말 그대로 폐위된 군주라는 의미이다. 고려·조선시대에 와서는 간신이나 권신에게는 악시(惡諡)를 내려서 일족에게 경계의 의미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깝다하여 시호를 내리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한국 역사상 가장 안 좋은 의미의 시호를 받아본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황무공(荒繆公) 이인임. 황무(荒繆)는 "국사를 농단하고 백성을 핍박했다"는 의미로 그의 권력남용을 비난하는 시호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인임이 죽고 조민수가 이인임의 시호를 결정해 내려주자고 조정에 건의를 했지만 시호 제정을 담당하는 전의부 관리들이 모두 발뺌을 하는지라, 전의부령 공부(孔俯)가 독단적으로 시호를 황무로 결정해서 올려버렸다. 이인임의 처조카 하륜과 같은 집안이었던 이숭인이 시호를 정해 올린 공부를 욕했는데, 공부는 농담이었다고 받아쳐서 시호를 내리는 문제는 유야무야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인임에게는 아무런 시호도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륜은 이인임 사후 친명파인 이성계의 편으로 들어가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고, 이후 이방원의 참모 역할을 맡아 공을 세워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에는 영의정부사까지 올라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다. 제대로 된 시호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받는다.

 

시호(諡號)

2) 요약 전근대시대에 죽은 자의 평생 공덕을 기려서 절차를 거쳐 정하여주는 명호.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에 있었던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점차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낮은 관직에 있던 사람도 증직되어 시호를 받기도 했는데 이때 시호를 내리는 일을 증시라 하고, 후대에 추증하여 시호를 내리면 추시라 했다.

추시는 대부분 종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의 돌아가신 부·조(祖)·증조에게 주어졌으나 점차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도 주어졌다. 이러한 시호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아서 요(堯)·순·우(禹)·탕(湯)·문·무(武) 등의 경우도 일부에서는 시호로 보기도 하나 시법의 제도가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주(周)나라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진시황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한(漢)나라 때에 다시 생겨 청(淸)나라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514년(법흥왕 1)에 선왕의 시호로 '지증'을 추증했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시법은 조선시대에 와서 많이 정비되었다. 특히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제조·도청·낭청 등을 임명하여 시책을 올리도록 했다. 1422년(세종 4) 이후로는 시호를 정하는 데 제조는 관계하지 않고 예조의 판사 이하만으로 의정하도록 하였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봉상시에서 주관했다. 그 절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호를 받을 사람의 자손이나 친척 또는 학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행장을 작성하여 예조에 제출한다. 둘째, 예조에서는 행장을 검토하여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에서는 행장에 근거하여 3가지 시호를 정해서 홍문관에 보낸다. 이를 시장이라 한다. 셋째, 홍문관에서는 응교 또는 부응교가 봉상시정 이하 제원과 다시 의논하여 정하며, 의정부의 사인·검상 중 1명이 이에 서경하여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넷째,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리고 왕이 그 위에 점을 찍었다. 시망도 비삼망이 일반적이나 단망일 경우도 있었다. 이 결정을 시호수점이라 했다. 다섯째, 수점 이후 대간의 서경을 거쳐 확정된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도 정해져 있었다.

 

〈주례 周禮〉의 시법에는 28자이고 〈사기 史記〉의 시법에는 194자이다. 1438년(세종 20) 봉상시에서 사용하던 글자는 194자였는데, 자수가 부족하여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하여 새로이 107자를 첨가했다. 그리하여 시법에 쓸 수 있는 자수는 모두 301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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