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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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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6 15:30 조회6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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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TV 시간여행 역사속으로' - 상소편


5) 염흥방(廉興邦: ?~1388, 우왕 14) 

염흥방(廉興邦)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의 아들로, 자(字)는 동정(東亭)이고, 호(號)는 어은(漁隱)이다. 공민왕 2년(1353)에 송천봉(宋天鳳)의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공민왕 6년(1357)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의 문하(門下)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가 공민왕 12년(1363)에는 위위윤(衛尉尹)으로 승직되었고,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경성(京城)을 수복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왕이 교육중흥을 위하여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그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주관하였다.
공민왕 16년 7월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으며, 공민왕 23년에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었다. 또 이해 4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이인임(李仁任)의 북원(北元)사신 영접에 반대하여 투옥된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의 배후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하였으나 곧 소환되어 서성군(瑞城君)의 봉작을 받았다. 우왕 10년(1384)을 전후한 시기에는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어 이인임(李仁任)과 더불어 국권을 총단하였다. 우왕 14년(1388)에 조반의 옥사(獄事)를 다루는 과정에서 왕의 미움을 받아 이인임 일파가 숙청 당하면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이색(李穡)과 일찍부터 교유하여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자호(自號)를 어은(漁隱)이라 하고 그에 대한 기(記)를 이색에게 부탁하였으며, 이색은 그를 위하여 수 십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목은집(牧隱集)'에 남기고 있다.
우왕 만년에 그가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권세를 잡고 탐학하는 인물로 변하자, 이색은 크게 실망하여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한미한 집안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田民)을 탈점하고 한꺼번에 큰 집 세 채를 지었고, 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릇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그를 평(評)하여 
동정(東亭)은 옛 것을 좋아하고 몸을 닦으며 참된 마음을 간직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렴주구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개나 돼지 보다 못하게 여기었고, 물고기나 자라 따위에게도 덕화를 입게 하여 널리 베푸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상촌선생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그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였고, 또 그가 행례(行禮)를 행할 때는 상촌선생으로 하여금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일찍이 그가 연회를 베풀 때 상촌선생을 직접 보내어 이색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색은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였고, 그 서운함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少壯元招老壯元 젊은 장원[金子粹]이 늙은 장원[李穡]을 초대하는데,
소장원초노장원
壯元郞又特傳言 장원랑(壯元郞)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는 구나.
장원랑우특전언
斯爲盛事足驚世 이것은 장한 일이라 세상을 놀라게 할 만 하지만,
사위성사족경세
只恨病軀難出門 다만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지한병구난출문
聚散却同萍與水 만나고 헤어짐은 흡사 물과 부평초 같으며,
취산각동평여수
閑忙只合酒盈樽 바쁘고 한가함은 술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가.
한망지합주영준
四支調適知何日 사지(四支)는 어느 때나 제대로 풀릴 것인가.
사지조적지하일
風雨蕭蕭獨○軒 풍우(風雨)가 소소(蕭蕭)한데 홀로 마루에 기댔도다.
풍우소소독의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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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 전경- 개성시 송악산에 위치, 
고려 초기에 건립 서울의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워진것임 

6) 문익점(文益漸: 1329, 충숙왕 16~1398, 태조 7) 
 

55.jpg문익점(文益漸)은 진주(晋州) 강성현인(江城縣人)으로, 부(父)는 숙선(淑宣)이다. 그는 처음에 이름을 익첨(益瞻)이라 하였으나, 후에 익점(益漸)으로 개명하였다. 자(字)는 일신(日新)이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또는 사은(思隱)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색(李穡)의 부(父)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공민왕 9년(1360)에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급제하였다. 이로써 정몽주와는 동년(同年)이 된다.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에 제수되었고, 이어 순유박사(諄諭博士)가 되어 성균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는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름사(計凜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에 갔다. 귀국하면서 그는 종자(從子) 김용(金鏞)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귀국하여 진주(晋州)에서 사돈인 정천익(鄭天益)과 더불어 이를 재배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목화가 전래된 기원이다.
우왕 원년(1375)에는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시학(侍學)을 겸하여 왕에게 학문의 도(道)를 논하였다.
이때에 조준(趙浚) 등이 주체가 되어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추진하였는데, 그는 이색과 뜻을 같이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집 후원에 정자를 지어 삼우당(三憂堂)이라 편액하고, 학문을 즐기면서 만년을 보냈다. 태조 7년(1398) 6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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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기념비 - 경북 의성 소재 
 그는 이색의 부(父)인 가정(稼亭)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일찍부터 이색과는 교분이 두터웠고, 정몽주와는 동년(同年)으로 또한 교분이 두터웠다. 이들과는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그와 상촌선생과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깊은 교유가 있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20여년 이상의 연상이었지만, 상촌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사랑하여 마치 벗과 같이 대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상촌선생이 여묘(廬墓)생활을 마치자, 이를 위로하면서 보낸 '김정언(金正言) 순중(純仲)의 여묘(廬墓)를 위문하며(慰問金正言純仲廬墓)'라는 시에서 알 수 있다.


7) 권근(權近: 1352, 공민왕 원년~1409, 태종 9) 

권근(權近)은 부(溥)의 증손으로 공민왕 원년(1352)에 출생하였다. 조(祖)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낸 고(皐)이고, 부(父)는 호군(護軍)을 지낸 희(僖)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진(晋)이라 하였다가 후에 근(近)으로 고쳤고, 자는 가원(可遠)이라 하였다가 후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호는 양촌(陽村)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공민왕 18년(1369)에 이인복(李仁復)과 이색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에 그의 나이 18세였다. 
과거에 합격하고 궁으로 들어가니 왕이 그를 보고 노하여 “저 어린 것이 어찌 합격하였는가”하였는데, 이에 이색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니, 가히 어리다고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배수하고 왕부(王府)의 필도치로 삼았다. 
공민왕 19년(1370) 8월에 이인복과 이색이 고시관이 되어 공사(貢士)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부시(赴試)하지는 못하였다. 공민왕 22년 6월에는 백문보(白文寶), 권중화(權仲和)가 고시관이 되어 공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도 합격하였지만 나이가 어려 부시는 하지 못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는 성균직강(成均直講)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우왕이 즉위하자 예의군부정랑(禮儀軍溥正郞)을 지내고, 이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우왕 6년(1380)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승보시(升補試)를 주관하여 홍상빈(洪尙彬) 등 110명을 선발하였다.
우왕 8년(1382)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배수하였고, 다음해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좌대언(左代言)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정도전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이치(李致)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어 그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더불어 명(明)에 사신으로 갔는데, 귀국하자 명(明)에서 보낸 국서(國書)를 먼저 보았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아 우봉현(牛峯縣)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다시 탄핵을 받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고, 이어 흥해(興海)로 옮겼다가 또 김해로 옮겼다. 얼마 후 윤이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얼마 후에 또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고, 태조 7년(1398) 4월에는 정도전과 더불어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가 되어 한량(閑良) 4품 이하의 유사(儒士)와 삼관유생(三館儒生)들에게 경사(經史)를 습독(習讀)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정종(定宗)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으로 책록되고 참찬의정부사로서 겸대사성을 맡아 성균관 교육을 담당하였다. 태종 2년(1402)에는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이 되었으며, 이 해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등 33명을 선발하였다. 
태종 5년(1405)에는 왕의 친시(親試)에 하륜(河崙)과 더불어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선발하였다. 태종 7년(1407)에는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제진(製進)하여 성균관을 비롯한 학교교육의 개혁안을 올렸고, 이어 학식(學式)을 제정하여 올렸다. 태종 9년(1409)에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향년 58세였다. 문충(文忠)이라 시호하였다.
그는 상촌선생과 막역한 벗으로 지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과거는 5년이 앞서는 공민왕 18년(1369)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막역하게 지냈다.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고, 상촌선생은 이색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허물없는 지기(知己)로 교유하였다. 이들은 우왕을 섬길 때 왕에게 직언(直言)으로 간하였고, 이로써 상촌선생은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되었으며, 그도 왕의 미움을 받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정언(正言)을 제수 받고 고향으로 떠날 때 이를 아쉬워 하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 보인다. 

匹馬千山路 필마(匹馬)로 첩첩산길을 돌아가는데,
필마천산로
孤鴻八月秋 외로운 기러기 날으니 팔월의 가을이로다.
고홍팔월추
歸寧之子迫 부모를 찾아 떠나는 그대이니 무척도 바쁠터이지만,
귀녕지자박
惜別故人愁 작별을 아쉬워함은 친구의 심정일레라.
석별고인수
芋栗村中樂 토란과 밤 등은 마을에서의 즐거움이고,
우율촌중락
○○物外遊 순채와 농어회로 세상 밖에서 노닐테지. 
박로물외유
也應同去○ 필시 함께 광을 떠나가면서,
야응동거광
笑我自悠悠 나 홀로 유유(悠悠)하다고 비웃을 테지.
소아자유유 

이 밖에도 상촌선생의 학문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교관으로 있었던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박의중(朴宜中)은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성균사예(成均司藝)였으며, 김구용(金九容)은 성균직강(成均直講)이었다. 그리고 이숭인(李崇仁)은 진덕박사(進德博士)로 있었으며, 정도전(鄭道傳)은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들로서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공민왕 16년(1367)의 교육중흥에 참여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던 자들이다. 이로 볼 때 이 시기에 성균관에서 수학한 그는 이들로부터 많은 학문적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비록 이들과의 관계는 기록이 누락되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모두 이색, 정몽주와 뜻을 같이한 지기(知己)였으며, 그 또한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막역하게 지냈음을 감안하면 이들과도 깊은 교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 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는 그와 막역하게 교유하였던 문인(門人)들을 들 수 있다. 그가 교유한 문인(門人)들을 살펴보면 조계생(趙啓生), 김진양(金震陽), 이문화(李文和), 정복주(鄭復周) 등을 그의 실록(實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계생(趙啓生)은 공민왕 12년(1363)에 출생하여 창왕 즉위년(13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그는 상촌선생의 후학으로 항상 그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교유하였다. 일찍이 상촌선생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생각하면서 '한산제영(韓山題詠)'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의 운(韻)을 차(次)하여 

山傍熊津疊成 산은 웅진강(熊津江)을 끼고 첩첩병장 이루어,
산방웅진첩장성
終敎李氏○其英 마침내 이씨일문(李氏一門) 그 영기(英氣)를 타고 났도다.
종교이씨품기영
自從父子登科後 저 멀리 원(元)나라에서 부자(父子)가 모두 등과(登科)하니,
자종부자등과후
天下皆知此邑名 천하(天下)는 모두 이 고을의 이름을 알게 되었네.
천하개지차읍명 
라는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이문화(李文和)는 인주인(仁州人)으로 자(字)는 백중(伯中)이며, 호(號)는 오천(烏川)이다. 우왕 6년(1380)에 염흥방(廉興邦)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상촌선생에게는 동문(同門) 후배가 된다. 그도 일찍부터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색도 그를 위하여 자(字) 백중(伯中)에 대한 설(說)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상촌선생을 선배로 받들어 존경하였다. 상촌선생이 일찍이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정몽주(鄭夢周)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도 이때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聞韶山水蕭灑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맑고도 깨끗하여,
문소산수소쇄
夜靜簾○月斜 밤은 고요한데 발[簾]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야정렴소월사
柳色靑靑客舍 버들잎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유색청청객사
香烟苒苒僧家 향기로운 내음이 승가(僧家)에서 은은히 스미네.
향연염염승가 
憂民便爲鶴髮 백성걱정에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우민편위학발
得雨還岸烏紗 비를 만나 강안(江岸)에 돌아온 검은 모자,
득우환안오사
六月未成一事 여섯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육월미성일사
却○前後皇華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각참전후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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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김진양(金震陽)은 계림부인(鷄林府人)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초려(草廬) 또는 초옥자(草屋子)라 하였고, 동두(童頭)라고도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이색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제수받았다. 이후 서해도(西海道) 안렴사(安廉使)와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쳤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공양왕 3년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고, 이어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는 글을 올려 유배시켰고, 이어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공양왕 4년(1392)에는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몽주와 이색의 당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그는 상촌선생보다 3년 먼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이들은 서로 벗으로 지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고 성격이 유달리 강개하였는데, 이 점에서 상촌선생과는 항상 통하였고, 또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상촌선생이 일찍이 빙허루(憑虛樓)에서 김사고(金師古)의 운(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도 더불어 같이 시를 지었다. 

此樓臨水又依山 이 다락은 물에 다달았고 산도 의지하였으니, 
차루임수우의산
仁智兼全二樂間 인지(仁智)는 이요(二樂)를 아울러 가졌도다.
인지겸전이락간
欲識主人成德處 주인의 큰 뜻 이룬 뜻을 알고 싶어 하거들랑
욕식주인성덕처
軒裳不動一心閑 벼슬에도 동하지 않는 마음, 한가함을 보려므나.
헌상부동일심한 

정복주(鄭復周)는 동래인(東萊人)으로 자(字)는 사고(師古)이고, 호(號)는 죽당(竹堂) 또는 육괴(肉塊)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강개하였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는데 엄격하였다. 상촌선생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가 일찍이 전라(全羅) 도관찰사(都觀察使) 장자충(張子忠)의 막사로 떠날 때 상촌선생은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惜別贈何物 이별의 아쉬움 무엇으로 증별(贈別)할 건가.
석별증하물
一盃千里春 한잔의 술에 천리의 봄 담아 보내노라.
일배천리춘
島夷方梗化 섬 오랑캐들 바야흐로 찍자부리고 있나니,
도이방경화
須使自來賓 모름지기 스스로 감화되어 오도록 하려므나.
수사자래빈 
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다. 

4. 思 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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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서원(포은 선생 배향)-경기도 용인시 모현면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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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 순절비각-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상촌선생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 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1374)의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미 그 기반은 닦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을 것이다.
우왕 원년에 그가 정언(正言)을 제수받고, 이색을 찾아가서 그의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는데, 이때 이색은 그의 학문의 깊이에 대하여 칭찬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색은 처음에 “나는 비유하면 제패와 같다. 학문이 조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찌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거절하였으나, 상촌선생이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음이여! 문왕(文王)의 순수한 덕(德)이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문왕(文王)의 업적이 하늘의 뜻에 부합한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로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것이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건(剛健)하고 정중(中正)하며, 순수(純粹)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德)입니다. 건(乾)의 덕(德)은 문왕(文王)의 덕(德)과 같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이색은 그가 학문의 대도(大道)를 깨우친 것을 알고 기뻐하면서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賢人)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聖人)은 하늘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것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설(說)을 지어 주고 있다.
위에서 볼 때 그는 이때 이미 성리학의 정수(精髓)를 체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건괘(乾卦)의 논리를 차(借)하여 자(字)로 하였고, 또 천(天)의 이치를 문왕(文王)의 덕(德)과 비유하면서 자신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생활철학으로 하여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리학 이념을 실현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행적은 당시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가 3년 동안 시묘(侍墓)할 때 이를 직접 목도한 남을진(南乙珍)은 

來見居廬子 내려와서 시묘(侍墓)하는 사람을 보니,
내견거려자
○前祭禮明 거적자리에 제례(祭禮)도 밝더라.
점전제례명
筍生誠意○ 죽순이 난 것은 정성이 간절함이며,
순생성의근
栢枯孝心傾 잣나무 마른 것도 효성이 지극함이지.
백고효심경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예법(禮法)과 효행을 기리고 있다.

당시 고려사회의 사상적 이념은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당시 이색, 정몽주 등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구조를 개변시키려고 하였으며, 또 이러한 의도에서 이들은 공민왕 16년에 교육중흥을 일으켰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진 명제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의 실천과 이단(異端)의 배척이었다. 그 또한 이러한 이념의 실천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하였고, 또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서 이의 실현을 건의하였다. 이제 그의 사상을 의리론(義理論)과 벽이론(闢異論)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義理論 

상촌선생은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것은 의성(義城)에 있는 김전서(金典書) 유(游)에게 보낸 제문(祭文)에서도 보인다. 

返我初服 나의 초복(初服)으로 돌아오니,
반아초복
薇蕨其志 미궐(薇蕨) 같은 그 심지(心志)요.
미궐기지
樂我名敎 나의 명교(名敎) 즐기니,
낙아명교
與世相違 세상과는 괴리(乖離)가 있었도다.
여세상위 

이러한 그의 생활은 관로(官路)생활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그가 우왕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조민수(曺敏修)에 대한 포상교서를 거부한 것은 이러한 그의 이념이 전제가 되고 있었다. 또 공양왕 때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는 이러한 그의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공양왕은 현릉대비(玄陵大妃)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공양왕은 즉위하자 생모(生母)인 국대비(國大妃)에게 효(孝)를 다 하면서 왕대비(王大妃)에 대하여는 예(禮)가 극히 소홀하였다. 이러한 왕의 처사에 대하여 그는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성을 극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하는 잠저(潛邸)시에 덕망이 빼어남을 듣고 백성들이 마음을 합하여 추대(推戴)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성(異姓)의 화(禍)를 방제하고 조종(祖宗)의 업(業)을 광복(光復)하였으니, 이는 모두 현릉대비(玄陵大妃)의 명(命)을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맹정책(主盟政策)의 공(功)으로써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삼한(三韓)이 그 의탁할 바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여 그 지위와 칭호를 정하고 책봉을 표시하는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성대한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하니 전하께서 왕대비를 섬기는 예가 마땅히 낳아주신 분보다도 더 두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해 남(南)으로 갔을 때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국대비(國大妃)의 전(殿)에는 친히 행차함이 한번 뿐이 아니요, 또 봉양도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왕대비(王大妃)의 전(殿)에는 일찍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이는 낳아서 길러 준 은혜만 알고 종묘(宗廟)를 계승하도록 한 일의 중함을 소홀히 한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전(傳)에 말하기를 ‘뒤를 이은 자는 그 아들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왕대비가 세상을 떠난다면 양음(亮陰)의 예(禮)는 마땅히 정성을 다 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섬기는 예도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사시(四時)의 절후(節侯)와 여름의 복일(伏日) 및 겨울의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먼저 왕대비의 전(殿)에 나아가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국대비의 전(殿)에 나아가도록 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또 그는 위의 상소에서 왕이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성리학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왕도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아들부터 책봉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세자를 책봉하려는 왕의 처사를 선후(先後)의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의리사상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때 그가 올린 상소의 내용에서 이러한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근일(近日)에는 봉숭도감(奉崇都監)을 두어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고 하는데, 신(臣)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하였는데 세자가 먼저 책봉의 예를 받는 것이 옳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아들이 비록 성인(聖人)과 같다 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봉록을 받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후(先後)의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제소(帝所 : 中國 皇帝)에 조회하여 명(命)을 받은 연후에 서서히 의논하여 행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중국의 사신이 와서 양마(良馬) 만 필을 징발하라, 하여 백관(百官)들이 분주하여 피곤한 터인데, 이때를 당하여 구태여 봉숭(奉崇)의 예를 거행하고자 하니, 이는 아마도 여론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행동강령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대의명분과 의리의 실천을 평생의 지침으로 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서 조선에 사환(仕宦)하지 않았다. 또 태종의 부름에 대하여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세상을 마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2) 闢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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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고려사회의 일반적 사상구조는 불교와 유교였다. 이 당시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道)로,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道)로서 양자는 공존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전래됨으로서 불교는 비로소 이단(異端)으로 규정되어 배척되기에 이르렀지만, 그 이전까지는 유자(儒者)도 불교를 숭상하여 재가불자(在家佛者)로 행세하였다. 특히 국난을 당하여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나 백성들이 삶의 위기를 느꼈을 때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타개하고, 또 민생의 삶을 구하겠다는 것이 일반적 사조로 되어 있었다. 거란(契丹)의 침입이나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장경(大藏經)이 간행되었던 것도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와서 안향(安珦),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 보급, 발전되었고, 또 불교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수 백년 동안 인습에 젖어 왔던 당시 사회에서 비록 성리학이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었다. 당시 이러한 사조는 고려말에 정도전(鄭道傳)이 정몽주(鄭夢周)에게 보낸 다음의 글에서 보인다. 

우리 동방(東方)은 그 폐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단(異端)을 돈독히 믿고 근엄하게 받들었으며, 또 대유(大儒)라 부르는 선비들까지도 이를 찬송하고 노래를 지어 읊었으니, 그 명성과 위세는 크게 떨쳤던 것입니다. 저 아래의 혼미한 백성들은 통달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쫓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왕(先王)의 학문은 적요(寂寥)하여 들림이 없고, 귀로 듣고 보는 것이 이단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강보(襁褓)에 어린아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먼저 이단의 말을 외었으며, 기뻐하고 재롱할 때에도 문득 그 몸짓을 배워 습관이 성품으로 이루어져 천연히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고 간사한 마음이 몸에 배어 굳어져서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직 그 학술이 마르고 또 도덕적인 수양이 깊어서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남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벗 달가(達可)는 바로 그 적격이라 하겠습니다. 달가는 비록 지위는 없으나 달가의 학술을 말한다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달가의 올바른 학술을 본받아 배웠고, 도덕에 있어서는 이를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달가의 통달한 덕성(德性)을 쫓아 닦았습니다. 하늘이 달가를 내심은 진실로 우리 도(道)에 복(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불교의 폐단이 막심하였다. 사원(寺院)은 막대한 농장(農莊)을 소유하고 있어서 국가의 재정을 파탄에 빠지게 하였고, 또 역대 왕들의 불사(佛事)로 농민들은 도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의 타락상은 일찍이 이제현(李齊賢)이 '중수개국율사기(重修開國律寺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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