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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상촌선생의 충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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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6 15:32 조회4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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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열전에서 본 상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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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서원(충북 음성군 생극면 소재)상촌공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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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돌산수 (상촌공 적거지,여수시돌산읍금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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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 효자비각(경북 안동시 안기동 소재)


우왕(禑王) 초년에 자수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왕의 정치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흐려지고 있었으므로 평생에 거짓을 꺼려하는 자수는 실로 용감하게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반성하기를 전했다.

때마침 조민수(曺敏修)가 밀양(密陽)에서 왜병과 싸워서 조그만 성공을 했는데 왕은 그 공을 과대평가해서 친히 옷과 술과 말(馬)을 내려서 지나친 상을 주었다.
그 얼마 전에 왜병과 싸워서 크게 패전한 조민수는 차마 그런 상을 받을 염치가 없었던지 이를 사양했다.
왕은 자수에게 그러지 말고 받으라는 회교(回敎)의 칙명을 쓰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자수는 왕의 이 분부를 단연 거절하고 왕의 상벌에 대한 불명(不明)을 당당히 아뢰었다.

「조민수는 경상도 일도(一道)의 병사(兵使)로써 김해대전(金海大戰)에서 왜병에게 대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었으니 그에 대한 견책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밀양 전투에서 조그만 공을 세웠다고 그전의 큰 죄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도 염치가 없어서 상양하는데 다시 전하란 분부의 회교는 신으로서는 쓸 수가 없습니다」

왕은 크게 노해서 자수를 당장 순위부(巡衛府)로 보내서 왕명 거역의 치죄를 명했다.
대사헌(大司憲)의 지윤(池奫)과 하윤원(河允源)등은 자수를 구금하고 장형(杖刑)에 처하려고 했다.

「아무리 왕명이라도 대사헌의 권한이라도 간관(諫官)인 나의 왕에 대한 의사표시는 절대자유다. 간관의 언권을 제한하면서 벌할 근거는 국법에 없고 본디 나라에 간관을 두게 된 이유는 군왕의 잘못을 고쳐서 보필하기 위함에 있다. 적어도 대사헌의 직책을 맡은 자들에서는 이만한 상식도 없이 나의 언권을 벌하려고 하는냐?」하고 항변했다.
이에 격분한 지윤은 자수를 볼기 친 뒤에 감옥에 넣거나 귀양 보내려고 조정의 중신들에 건의했다.

그러나 재상들까지도 겁을 내고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했다. 오직 한사람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보림(李寶林)만이 용감히 의견을 말했다.

「자수 개인으로는 비록 소유(小儒)에 불과한 선비지만 적어도 일국의 간관의 지위에 있습니다. 만일에 어지(御旨)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간관도 벌을 받는다는 전례를 만든다면 장차 어찌 될까가 두렵습니다만 부득이한 경우라도 체형은 불가합니다」

조정의 제신들도 이보림의 말이 당연했으므로 귀양만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왕은 그 중신회의의 결의에도 불만이었다.
「이미 순위부에서 그 죄를 판정했는데 그렇게 감형할 수는 없다」
이것이 왕의 주장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우사(右使) 김적명(金積命)이 태후를 통해서 왕의 노염을 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궐도 들어가서 태후에게 사유를 구신 하고 왕으로 하여금 관대한 처분을 하도록 전해 달라고 간청했다.

「소신은 무신(武臣)이라 사리에 어둡습니다만 문신들의 의견은 모두 간관은 비록 어지에 어긋나는 말씀을 아뢰어도 죄를 줄 수 없다 합니다. 그것은 군왕께서도 사리를 잘못 판단할 수가 있으므로 그럴 때 자유롭게 바른 말씀을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설령 이번에 정언 김자수의 허물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지극히 적으니 이것을 과중하게 책해서는 안 될까 하옵니다」

이런 진정을 들은 태후는 마침내 왕에게 말했다.

「내 늙어서 여러 가지 일을 보고 들었지만 아직 간관을 형장으로 쳐서 욕보인 일을 듣지 못했소. 만일에 간관의 말문까지 막아 버린다면 국사는 장차 그르치고 말 우려가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소?」 

태후의 이런 청으로 말미암아 자수는 형장의 매를 맞지 않고 전라도 돌산(突山) 땅으로 귀양 가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에 귀양에서 풀려 다시 등용되자 누진해서 요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공양왕, 때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세자좌보덕(世子左補德)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공양왕은 광신적이라 할만큼 불교를 숭상했으며 불교의 미명하에 횡행되는 무복(巫卜)의 미신까지 장려하는 폐단을 가져오게 했다.
철두철미한 유교 도덕을 실천하던 자수는 또다시 장문의 상소를 올려서 왕의 잘못을 손책했던 것이다.
또 왕이 그 생모인 왕대비(王大妃)에게 효성이 부족한 것도 반성하도록 아뢰었다.
이 점은 자수 자신이 묘막살이 삼년상까지 모신 효자였던 만큼 절실한 권고였다.

『전하께서 왕대비 계신 궁전에 한 번도 행차하시지 않고 봉양에 소홀하심은 인자(人子)로서 생육(生育)의 은혜를 잊은 큰 잘못이옵니다. 자손으로서 효도를 함은 인륜의 대의이옵니다 왕대비가 돌아가신 뒤에 아무를 제사를 성대히 지어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 계실 때의 봉양만 못합니다. 원컨대 금년부터는 설에는 반드시 맨 먼저 왕대비께 세배를 올리러 가시고 추울 때 더울 때 문후를 게을리 하지 마옵소서』

마치 어린 학동에게 훈계하는 듯 권고하였다. 김자수가 아니고는 감히 왕에게 이런 상소는 못했을 것이다. 또 지나친 불교 숭상에 대한 폐단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직후에 연복사(演福寺)의 절과 탑을 크게 확장하기 위해서 부근의 민가를 삼사십 호나 헐어 버려서 무고한 백성을 울리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사찰 건립을 위해서 큰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고 항간의 재물을 징발하고 과중한 부역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농시를 맞아서 한참 손
이 부족한 시절인데 모든 도로에는 목재와 석재 운반으로 길이 막혔으며 인축의 힘은 모두 이 때문으로 피로의 극에 달한 찰나이옵니다. 죽은 뒤에 명복을 빌기 위한 절 때문에 이토록 백성의 생령들이 실화(實禍)를 받게 하시는 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이신 도리이겠습니까? 만일 부역이 필요하시면 그들 농사에 바쁜 선량
한 백성 대신에 차라리 무위도식하는 죄수들을 사역시키는 방법이 나을까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하가 즉위하신 뒤로 아직 종묘를 비롯한 여러 능을 수리하셨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사찰의 수리와 신축에만 막대한 국비를 기울이고 백성의 부역을 명하시는 것도 또한 성덕의 한 가지 결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불교를 많이 숭상했지만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한 고사(故事)를 많이 남기었습니다. 본디 부도(浮屠)설도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괴탄황환(怪誕荒幻)한 무술(巫術)의 도량이겠습니까? 지금 국내에 무당음사(巫堂淫祀)가 난립해서 국가 행사를 빙자하고 고취가무(鼓吹歌舞)하여 풍속을 문란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한 명찰 하시고 빨리 고치시도록 칙명을 내려줍소서. 신은 일찍이 충간을 올리다가 귀양까지 당한 일이 있사오나 아직도 위국일념(爲國一念)에서 이런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런 김자수의 용감한 상소에 격려된 성균생원(成均生員) 박초(朴礎)등은 같은 취지의 상소를 한 바 왕은 당연지사 크게 노했다. 이때 성균원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주의 선비들이 궐기했다. 그러나 생원들은 탄압도 받고 성균관에서 축출되거나 잡혀 갇히거나 귀양을 당하고 말았다. 자수는 의견을 같이하던 수많은 동지들이 분개하고 자기의 입장도 공직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사퇴원의 상소를 했다.

그러나 자수의 언행이 과격했어도 그의 사심이 없는 충성과 인격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므로 허락치는 않고 일단락된 바에야 서서히 자수의 주장을 따르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실로 이러한 인격의 김자수였다.
정치적으로 비상한 이태조는 고려 때의 중요한 정계의 인재를 널리 포섭해서 자기의 새로운 정권에 협력시키려고 했다 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상촌 김자수에게는 그때 새 정부의 헌장(憲長)이 되어 달라고 초빙했다. 이에 상촌은 예아닌 말은 듣기도 더러운데 무슨 대꾸를 하냐고 종시 묵살해 버렸다. 태조는 이러한 상촌의 태도에 크게 노했다.
「만일 경이나 나의 부름을 끝까지 거역하면 사형에 처할 터이니 다시 한 번 생각해라!」
하는 강경한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에 상촌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놓고 스스로 자결한 것이었다. 

평생충효의(平生忠孝意)
금일유수지(今日有誰知)
일생오휴한(一生吾休限)
구원응유지(九原應有知)
내평생의 충효의 뜻
금일 뉘 알리요
나 한 번 죽어 원한의 눈감으면
저승의 구원에서 알아 줄 이 있으리 

후에 상촌의 자결을 알게 된 방촌 황희(黃喜)는 상촌(桑村)의 만가를 읊어서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유충유효난(有忠有孝難)
유효유충난(有孝有忠難)
이자기운득(二者旣云得)
황우살신난(況又殺身難) 
충신은 되기 어렵고
효자도 충신 되기 어려운데
그 둘을 못 이루었을 뿐아니다
가장 어려운 마음까지 죽인 분이여 

태조의 북행 행렬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개경에 닿은 것은 그 다음날 저녁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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