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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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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6 15:22 조회6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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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의 삶
이 글은 전편에 이은 신천식 교수의 논문에 실린 글임
상촌 선생의 생애와 사상 - (2편)
조선시대 상촌 선생의 행적

이에 우왕은 매는 면하게 하고 전라도(全羅道) 돌산수(突山戌)로 유배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생각하기를 상촌선생은 반드시 낭사(郎舍)와 더불어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우(鄭寓)를 경상도(慶尙道) 죽림수(竹林戌)로 유배하였다. 해가 지나자 편의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고신(告身)을 환급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인 안동에서 유유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시에서 당시 그의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新樓壓水對靑山 새로운 다락은 물을 굽어보고 청산을 마주하는데,
신루압수대청산
朝暮烟嵐?案間 아침저녁으로 연기와 아지랑이 책상 위에 머무네.
조모연람궤안간
幸有村庄?隔岸 다행히 촌장(村庄)은 언덕 하나에 사이 하였으니, 
행유촌장재격안
暮年投?共淸閒 늙으막엔 인수(印綬) 내 던지고 한가함 함께 하리라.
모년투불공청한

이후 전교부령(典校副令)을 제수받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겼다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으며, 얼마 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로 출보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소환되었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는 세자시학(世子侍學)을 겸하였고, 얼마 후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라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겸하였다. 이때 그는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당면 정치의 개혁안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크게 5개항으로 분류된다.

첫째, 왕대비(王大妃)에 대한 예(禮)를 존숭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도록 건의하였고,
둘째, 봉숭도감(奉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데 대하여 이는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그 설행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셋째, 왕의 숭불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고,
넷째, 무당들의 행패를 근절시키고 이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건의하였고,
다섯째, 지금까지 직언(直言)으로 폄출된 자들을 소환하도록 건의하였다.

얼마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고,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는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좌상시(左常侍)로 전보되었는데,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왕에게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10인은 본시 우리 나라 사람들로서 요행히 함부로 천거된 자 들입니다. 이들은 혹은 창기(倡妓)에 의탁하거나 혹은 친척의 연분으로 청탁하여 벼슬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방편상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되니, 진차(眞差 : 眞職과 假職)와 첨설(添設)이 문득 100여 자리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기(名器)의 범람함과 염치의 상실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컨대 이들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직을 모두 박탈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또 삼사(三司)의 관원수가 15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녹패(錄牌)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외의 전곡(錢穀)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고, 사사(使司)는 이를 삼사사(三司使)에 이첩하여 회계를 정밀히 조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하게 한다면 재정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놀고 먹는 관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건의를 올렸다. 왕은 이를 수용하였고, 바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발탁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후 그는 고려 태조(太祖)의 릉(陵)을 참배하기도 하고, 또 송악산(松岳山)을 찾아 유유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가 망한 후 개성의 송악산을 찾아서
春風騫馬看山客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춘풍건마간산객
步步遲來萬樹陰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萬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보보지래만수음
澗畔林深無怪石 시냇가의 숲은 깊으나 괴이한 돌은 없고,
간반림심무괴석
?崖花落摠新禽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
장애화낙총신금
三盃酒氣論今日 석잔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삼배주기논금일
一曲松聲報古琴 한곡조 송성(松聲)은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주네.
일곡송성보고금
故國蒼茫如昨事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의 일과 같나니,
고국창망여작사
忠臣烈士共爭吟 충신 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충신열사공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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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능

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라고 하여 고려가 망하자 새로운 사람들이 지조 없이 날뛰고 있음을 개탄하고는 ‘충신 열사는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는다’라고 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고 있다. 또 그는 부조현(不朝峴)에 올라서

忠臣烈士今安在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충신열사금안재
飛去山禽語古春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비거산금어고춘
玉階花心風後老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옥계화심풍후노
金陵樹色雨中貧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금릉수색우중빈
應知日短淸香閣 알괴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응지일단청향각
想必天寒觀德人 필시 관덕인(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상필천한관덕인
感淚振衣臺上客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감루진의대상객
此時幾泣我王身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
차시기읍아왕신

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위의 시에서 ‘충신 열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라고 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토로하고 있다. 또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릉(陵)을 참배하고

修德就閒後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수덕취한후
臣維安獨歸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신유안독귀
榛?爲誰詠 진령(榛?)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진령위수영
葵藿自春開 규곽(葵藿)은 봄부터 피어있구려. 
규곽자춘개
泣下風雲淚 풍운(風雲)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읍하풍운루
踏來塵劫灰 진세(塵世)의 겁회(劫灰)를 밟아 왔다오.
답래진겁회
侍陵將?酒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시릉장뢰주
北斗影徘徊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
북두영배회

라는 시를 지어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대사헌(大司憲)의 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太宗)은 평소부터 그의 덕망을 존경하고 있어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직을 내려 부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나라가 망하니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향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은 세우리 말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이어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忠孝),
평생충효의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금일유수지
一死吾休恨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일사오휴한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구원응유지

라는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는 태종(太宗) 13년(1413) 11월 14일이었고, 향년 65세였다. 그가 죽자 후학(後學)인 황희(黃喜)는

有忠有孝難 충(忠)이 있으면서 효(孝)가 있기는 어렵고,
유충유효난
有孝有忠難 효(孝)가 있으면서 충(忠)이 있기도 어려운데,
유효유충난
二者旣云得 이 두가지를 이미 다 얻어 가졌었건만,
이자기운득
?又殺身難 하물며 살신(殺身)의 어려움까지야.
황우살신난
라는 만사(挽詞)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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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대성전


3. 學問的 背景

상촌선생의 학문적 배경은 학문의 수학기(修學期)와 정연기(精硏期)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수학기는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크게 가정 교육기와 성균관 교육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게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가문(家門)은 그가 출생할 때는 비록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조부(祖父) 영백(英伯)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였고, 부(父) 오(?)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있었다. 삼사(三司)의 직은 국가재정을 관할하는 관부(官府)였고, 통례문(通禮門)은 조정(朝廷)의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부(官府)였다. 또 지제고(知制誥)는 왕명(王命)을 받들어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관직이었다. 이로 볼 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하였던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문에서 생장(生長)한 그는 일찍부터 조부(祖父)와 부(父)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성균관 입학전의 그의 학문적 배경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보편적인 교육사조를 볼 때 학당(學堂)이나 십이도(十二徒)에서 수학하였을 것이다. 이색?정몽주 등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 수학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시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교육중흥을 일으키던 때였다. 그 당시 교관들은 모두 당대의 석학들이었고, 이들은 성리학(性理學)의 보급을 자기의 임무로 알아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대사성(大司成)으로 교육의 책임을 맡았던 이색이 후일 이때를 생각하면서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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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璧水光陰記少年 벽수(璧水 : 성균관)에서 보낸 세월 생각하니 젊은 때였구나.
벽수광음기소년
八齋環列誦聲連 둘러선 팔재(八齋)에선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았네.
팔재환열송성연
升堂最?抽籤講 당(堂)에 올라 추첨 뽑아 강(講)함을 두려워 하였네.
승당최파추첨강
爲是音訛意莫傳 글자 잘못 읽어 뜻을 잘못 전할까 해서였지.
위시음와의막전
當時諸子摠眞儒 당시의 제자(諸子 : 교관)들은 모두가 진유(眞儒) 였도다.
당시제자총진유
說到精微肯?? 정미(精微)한데 이르러도 머뭇거림 없었도다.
설도정미긍섭유
獨有牧翁長閉口 홀로 목옹(牧翁)만이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어,
독유목옹장폐구
中堂兀坐似枯株 중당(中堂)에 오똑앉아 마치 마른 나무 같았지.
중당올좌사고주
敎養諸生豈有他 제생(諸生)들을 교양하는데 달리 길이 있으랴.
교양제생기유타
欲令風化播中和 풍화를 바꾸어 중화(中和)의 도(道)를 펴려했지.
욕령풍화파중화
金陵王氣回天意 금릉왕기(金陵王氣)의 천운을 돌리려는 뜻을 펴니,
금릉왕기회천의
講舌徒然似決河 강론하는 혀가 마치 둑을 터트린 강물 같았네.
라는 시에서도 보인다.
당시 그에게 감화를 준 성균관 교관들을 살펴보면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색과 정몽주는 그의 인품과 학문을 사랑하여 제자로서보다는 벗으로써 예우하였고, 그도 이들을 스승으로 받들면서 평생토록 뜻을 같이하였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관(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관로(官路)생활을 통하여 그의 은문(恩門) 및 교유문인(交遊門人)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연되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미 석학(碩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의 은문(恩門)인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은 그를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과 합격자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이들은 서로 은문(恩門)과 문생(門生)의 관계를 가지면서 그 의리(義理)는 마치 부자지간(父子之間)과 같았다. 과거 합격자의 방(榜)이 발표되면 고시관은 자기 문하에서 합격한 문생들을 불러 학사연(學士宴)을 베풀어 이들을 축하하였는데, 이때 고시관은 그가 합격할 때의 좌주(座主)도 초청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경비를 출연하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 궁중 음악을 하사하여 축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성현(成俔)이 ?용재총화(傭齋叢話)?에서

전조(前朝) 과거(科擧)에서 시관(試官)은 지공거(知貢擧)?동지공거(同知貢擧) 2명 뿐이었으며, 문신(文臣)으로서 명망 있는 자로 이를 삼았다. 은문(恩門 : 考試官)은 문생(門生 : 科擧合格者) 보기를 자제와 같이 하고, 문생은 은문 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여 데릴사위는 내실에 들어가지 못하여도 문생은 상견(相見)함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문생을 더욱 중히 여기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고, 또 권근(權近)이

우리 동방(東方)은 고려 시대 광종(光宗) 이래로 그 예(禮)가 지극히 풍성하여 무릇 고시(考試)를 맡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풍성한 음식을 장만해 놓고 공복(公服) 차림으로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좌주(座主)를 모셔다가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마치 자기 부모에 대한 대접과 다름이 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유사(有司)에 명하여 청사(廳舍)를 마련하도록 하고 특별히 내악(內樂 : 宮中音樂)을 내려 축하하니, 이로 말미암아 좌주는 문생 보기를 자식과 같이 하고 문생은 좌주 보기를 어버이 같이 하였으니, 사제(師弟)의 예가 후하다고 할 만하다.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합격한 자들은 동년(同年)으로 결합되어 동년회(同年會)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이때 장원 급제자가 동년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 회(會)를 주관하였다. 이들은 우의를 돈독히 하면서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서로 이끌어 주었고, 또 정치적인 견해도 같이 하였다. 이것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신돈전(辛旽傳)에서

이때 왕[공민왕]은 왕위에 오른지 오래되었고, 재상(宰相)들은 많았으나 뜻을 펴지 못하였다. … 또한 문생(門生)?좌주(座主)?동년당(同年黨)이니 하여 서로 사정(私情)에 얽매임으로 삼자(三者)는 모두 쓸모가 없다고 보았다. 이로써 속세를 초월하여 우뚝 선 인물을 구하여 크게 등용함으로써 인습이 된 폐습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라고 한 것에서 보인다. 
또 같은 은문으로부터 배출된 자들도 서로 선후배의 동문(同門)으로 결합되어 유대가 돈독하였다. 이것은 공민왕 18년에 이색의 문하에서 합격된 권근(權近)이 공민왕 14년에 이색의 문하에서 합격한 맹희도(孟希道)에게

나는 선생의 뒤를 이어 기유년(己酉年 : 恭愍王 18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선생을 형으로 대해 온지 몇 해가 되었다. …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이러한 과거 운영은 결과적으로 좌주(座主)?문생(門生)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여 갔고, 또 좌주를 중심으로 학맥(學脈)이 형성되게 된다. 특히 고려 후기에 성리학(性理學)이 전래됨으로써 성리학의 의리사상과 대의명분은 이러한 사조를 가속화시키게 된다. 
고려 후기에 과거 고시관(考試官)을 맡았던 자들은 그 자신의 학문을 그들 문생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고, 또 그 자신의 은문(恩門) 또는 문인(門人)으로부터 수용하였던 학문을 전승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인 배경하에서 그도 은문(恩門)인 이무방(李茂芳)과 염흥방(廉興邦)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학문적인 배경을 사문(師門)과 은문(恩門), 그리고 교유문인(交遊門人)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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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이색(李穡)은 고려말의 대학자로 자(字)는 영숙(潁叔)이고, 호(號)는 목은(牧隱)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부(父)는 가정(稼亭) 이곡(李穀)이다. 충숙왕(忠肅王) 15년(1328)에 출생하여 14세인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2년(1341)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0세인 충목왕(忠穆王) 3년(1347)에 원(元)에 가서 그곳의 국자감(國子監)에서 3년동안 수학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년(1353) 5월에 이제현(李齊賢)과 홍언박(洪彦博)의 문하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동년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실시한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다음해 2월에는 원(元)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학문이 빼어나 그가 과거에 합격한 5년 후에 공민왕으로부터 “이색(李穡)은 재주와 도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다”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이 중건되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여 교육중흥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그는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에게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고, 교육체계를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로 개편하여 교육을 일으키니, 학교교육이 크게 중흥을 맞게 된다. 상촌선생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는 시기도 이때 그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다.

1) 이색(李穡: 1328, 충숙왕 15~1396, 태조 5)

그는 공민왕 20년(1371)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이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다. 공민왕은 그를 유종(儒宗)으로 받들어 존경하였고,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禑王)도 그를 사부(師傅)로 받들었으며, 창왕(昌王)은 그에게 검리상전(劍履上殿) 찬배불명(贊拜不名)의 특전을 내렸다.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조정에 나오도록 권고하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켜 이를 거절하였다. 태조(太祖) 5년(1396) 5월에 여흥(驪興)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그는 당시 모든 학자들로부터 유종(儒宗)으로 존경을 받았던 대학자였다. 그는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불교(佛敎)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고, 역사(歷史)에도 높은 식견이 있었다. 그는 재임 중에 6차에 걸쳐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역임하여 무려 135명의 문생(門生)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생들은 이후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고려 후기 및 조선 초기의 학문 발전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권근(權近)과 하륜(河崙) 등이 있다. 또 그의 문생은 아니지만 그가 성균관 교관으로 있을 때 배출한 인재도 수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 상촌선생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그는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자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어 축하하였으며,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인 염흥방(廉興邦)이 이에 대한 답례로 연회를 마련하여 그를 초청하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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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인

斯門盛會世無多 사문(斯門)의 장한 모임 세상에 많지 않아서,
사문성회세무다
每向東亭簇玉珂 동정(東亭)을 찾으면 인재가 가득하더라.
매향동정족옥가
桃李門庭移日語 도리(桃李)의 문정(門庭)에서 늦도록 말을 나누는데,
도리문정이일어
綺羅絃管?雲歌 비단결 같은 관현(管絃)은 구름도 멈춰서서 노래하네.
기라현관알운가
滿前才俊今如許 뜰 앞에 가득한 재준(才俊)들 이제는 얼마나 되는지,
만전재준금여허
居右衰遲我奈何 상석에 앉은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어찌할꼬. 
거우쇠지아내하
泥醉夜深歸柳里 크게 취하여 깊은 밤에 유리(柳里)로 돌아오니,
이취야심귀유리
洗空塵慮?天河 티끌 같은 마음 말끔히 씻기니 은하수가 다가서네.
세공진려세천하

 

상촌선생도 이색의 학문을 존경하여 그의 문하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상촌선생은 이색을 찾아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색은 크게 기뻐하면서 자(字)에 대한 설(說)을 지어 주었는데, 그 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인년(甲寅年) 장원(壯元) 김정언(金正言)이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은 자수(子粹)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선생께서는 그 뜻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수는 마음속 깊이 이를 간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바가 또한 얕지 않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명(命)은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는다.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고 크면서도 빠뜨림이 없으니, 어찌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와 상뇌(霜露)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 어찌 일찍이 조그마한 어김이라도 있었던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와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乾卦)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자강(自强)하여 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사람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하겠다. 군자(君子)가 자강(自强)하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廢)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에 이르자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보다 후에 하더라도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하니, 하늘이 바라는 묘한 이치가 이에 나타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역(易)의 괘효(卦爻)를 찬(讚)하였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주공의 뜻을 따르는 바이다.
붉은 신발을 보더라도 진중한 모양을 갖춘다면 마음이 어찌 순일(純一)하지 않겠는가. 문왕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를 파장결부(破?缺斧)의 때에도 행하니, 이로써 풍속을 바꾸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은 순일하여 쉬지 않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말하기를 “역경(易經)에 처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주공(周公) 같은 성인(聖人)도 이와 같은 때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디를 쫒아서 그 효(孝)를 성취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純仲)이 장원(壯元)에 뽑히어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가히 현달(顯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에 버림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 권면하는 바이니, 지킴이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지킴이 있으면 순일(純一)하여 질 것이다.

상촌선생도 만년에 이색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東國文章集大成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동국문장집대성
稼亭父子冠群英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가정부자관군영
山川孕秀今猶古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산천잉수금유고
借問何人繼盛名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차문하인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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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의 묘
2)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 6~1392, 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는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에 영천군(永川郡)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우항리(愚巷里)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가 9세 때에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관례(冠禮)를 치른 후에 몽주(夢周)로 다시 고쳤다. 자(字)는 달가(達可)이고, 호(號)는 포은(圃隱)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그는 21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의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4세인 공민왕 9년(1360)에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의 문하에서 연괴삼장(連魁三場)하여 탁제(擢第)하였다.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이 중건되고 이색이 교육중흥을 일으킬 때 그는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게 되었고, 이로써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동료 교관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이색으로부터는 “포은(圃隱)의 횡설수설(橫說竪說)은 이치에 맞지 않는 바 없다”라는 칭송을 받게 된다. 이로써 다음해에는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승차(陞次)하고, 공민왕 20년(1371)에는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직되었으며, 공민왕 23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색을 이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이 되었다. 상촌선생이 입학하여 그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있을 때였다.
공민왕이 피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이 해에 이인임(李仁任)을 비롯한 친원(親元)세력들이 발호하여 지금까지의 친명정책(親明政策)을 버리고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려고 하자 그는 성균관에서 교관으로 같이 활약한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 등 10여인과 더불어 글을 올려서 그 부당성을 극간하였다. 이로써 그는 언양(彦陽)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상촌선생은 그와 뜻을 같이 하였지만 조민수(曺敏修)를 포상하려는 왕에게 그 부당성을 극간하여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당하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하였다.
이후 예의판서(禮儀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우왕 10년(1384)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다음해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창왕 원년(1389)에는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배수하고, 얼마 후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킨 공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는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제수 받아 인사권을 총괄하였고, 공양왕 4년 2월에는 대명률(大明律) 지정조격(至正條格)과 본국의 법령을 참작하고 산정(刪定)하여 신율(新律)을 지어 바치니, 왕은 지신사(知申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이를 무려 6일이나 걸쳐 진강(進講)하게 하면서 누차에 걸쳐 그 정교함에 탄복하였다.
그는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이성계 일파의 세력들로부터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대외정책과 정치개혁에서는 서로 동조하는 입장에 있었던 이를 두 사람의 관계는 고려왕권의 맥락계승에 있어서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양왕 4년은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공양왕 4년 4월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것은 바로 고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상촌선생은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였고,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는 상촌선생과 비록 15세의 차이가 있었고, 또 서로간에는 사제(師弟)의 관계에 있었지만 그는 상촌선생을 벗으로 예우하였고, 상촌선생 또한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예(禮)를 다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상촌선생이 안동(安東)으로 낙향하였을 때 그는 직접 안동으로 찾아와 위로하였고,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그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지은 상촌선생의 시에서도 보인다. 이때 상촌선생은 그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있다.

烏川先生傑作 오천선생(烏川先生 : 정몽주)의 작품은 훌륭하도다.
오천선생걸작
字?整整斜斜 자(字)와 획(?)이 바르고도 비스듬하도다.
자화정정사사
道德優遊聖域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도덕우유성역
篇章獨步詩家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 났도다.
편장독보시가
壁間喜看濃墨 벽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벽간희간농묵
板上恨未籠紗 마루[板上]위에서는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는구료.
판상한미농사
屹屹高山仰止 우뚝하게 높은 산[포은을 지칭] 우러러 보니,
흘흘고산앙지
顔衰正怯年華 나이 늙어 얼굴이 쇠하니 참으로 두렵도다.
안쇠정겁년화

3) 박상충(朴尙衷: 1332, 충숙왕 복위 원년~1375, 우왕 원년)

박상충(朴尙衷)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수(秀)의 아들로, 충숙왕 복위 원년(1332)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성부(誠夫)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공민왕 2년(1353)에 이제현(李齊賢)과 홍언박(洪彦博)의 문하에서 이색(李穡) 다음의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따라서 이색과는 동년(同年)이 된다. 이로써 벼슬길에 나아가 얼마 후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시에 문란한 향사(享祀)의 의례(儀禮)를 고례(古禮)에 준하여 조목(條目)별로 정리하여 사전(祀典)으로 삼으니, 이것은 이후 향사(亨祀)의 준칙이 되었다. 이때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는 3년 상을 치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士大夫)들은 부모의 상을 100일만 입고 탈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100일이 지나자 나라에서 전교령(典校令)을 제수하니, 그는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3년 동안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성균관을 중건하고 이색을 겸대사성으로 삼아 교육중흥을 펴게 되는데, 이때 그도 타관(他官)으로서 교관(敎官)의 직을 맡아서 교육에 전념하였다.
공민왕이 피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당시 조정은 이를 비밀로 하였는데, 그는 성균사예(成均司藝)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명(明)에 사신을 보내 상사(喪事)를 알리도록 권고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이인임(李仁任)은 찬성사(贊成事) 안사기(安謝琦)와 더불어 원(元)과 화친하고자 김의(金義)를 사주하여 명(明)의 사신 채빈(蔡斌)을 죽였는데, 그는 상소를 올려 “이제 만약에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안사기(安謝琦)를 처벌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로써 안사기(安謝琦)는 처형되었다. 얼마 후 이인임(李仁任)이 종친(宗親)을 비롯한 권문세족(權門勢族)들과 결탁하여 연명으로 글을 만들어 북원(北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려 하자, 그는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선왕(先王)은 이미 명(明)을 섬기도록 결정하였으니, 마땅히 원(元)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하고는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이때 북원(北元)의 사신이 내조(來朝)하자 그는 상소를 올려 이를 물리치도록 극간하였다. 또 간관(諫官)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도 상소를 올려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논하고 그의 목을 베도록 청하였다. 이로써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은 투옥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 배후세력으로 그와 전녹생(田祿生)이 지목되었고, 이로써 유배되어 중도에서 죽었다. 이때는 우왕 원년 7월이었고, 그의 나이 44세였다.
상촌선생이 그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은 공민왕 19년(1370)이었다. 그가 우왕 원년에 죽음을 당함으로써 상촌선생과의 교분은 깊지 않았지만 그는 상촌선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이것은 상촌선생이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의 시중을 위하여 성균관을 퇴관할 때 그가 아쉬워 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귀근(歸覲)하는 생원(生員) 김자수(金子粹)를 보내면서(送生員金子粹歸覲安東)?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4) 이무방(李茂芳: 1319, 충숙왕 6~1398, 태조 7)

이무방(李茂芳)은 찬성사(贊成事)를 증직(贈職) 받은 인미(仁美)의 아들로, 충숙왕 6년(1319)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석지(釋之)이고, 호(號)는 남곡(南谷)이며, 본관은 광양(光陽)이다. 이색(李穡)과는 16~17세 때부터 함께 교유하면서 공부하던 지기(知己)이기도 하다.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김광재(金光載)의 문하에서 이색과 더불어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충목왕 3년(1347)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한산군(韓山君)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전교교감(典校校勘)을 제수받았고, 공민왕 초에 순창군지사(淳昌郡知事)로 출보하였다. 이후 장령(掌令)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고 민부상서(民部尙書)를 배수하였다. 얼마 후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가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의 호를 하사 받고 밀직학사(密直學士)에 승보하였다. 이때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니 왕은 그에게 명하여 경안전(慶安殿)에서 비를 빌게 하였는데, 그는 연비(燃臂)를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공민왕은 이를 듣고는 “백성 사랑함을 이와 같이 하니 가히 수상(首相)이 되겠다”라고 경탄하였고, 얼마 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제수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의창(義倉)을 설립하여 백성들을 규휼하였고, 또 밝은 덕으로 교화를 베푸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듣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소환하고 여절공신(礪節功臣)의 호를 더하여 하사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하였는데, 이때 왕은 그에게 “이정당(李政堂)은 나라를 위하여 집을 잊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비록 고인(古人)이라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 염흥방(廉興邦)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로써 그는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이 되었다. 이후 상촌선생은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된다.
우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열고 전녹생(田祿生)과 더불어 그를 사부(師傅)로 삼았다. 우왕 2년(1376)에는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에게 공민왕 시해에 가담한 한방신(韓方信)과 노진(盧?)의 재산을 적몰하지 않은 책임을 극렬하게 통박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광양군(光陽君)의 봉함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소환되어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제수받았다.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배수하였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여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의 호를 내렸다.
조선이 건국되자 문생(門生) 조준(趙浚)의 천거로 다시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 되고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작되었다. 태조 7년 8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80세였다.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백성 사랑하기를 부모를 받들듯이 하였다. 이색이 그의 행적을 평하면서

그가 베푼 사랑은 백성들의 마음에 남아 있고, 그의 빛나는 이름은 물망(物望)에 합하니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로다. 다음날에 큰 계책을 세워 위로 임금의 덕화 펴기를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에서 일어나던 때와 같이 할 것인지 이는 모두 하늘에 있는 일일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신천식 교수

경남 진해 출생
문학 박사
현 명지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저서:한국 교육사연구
        한국 민족사(공저)
        고려 교육제도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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