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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열전에서 본 상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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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26 15:24 조회5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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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열전에서 본 상촌선생
제2부 상촌선생의 효행편??????
전편에 이어

그러면 여기에서 김자수의 그 인물됨을 잠깐 더듬어 보고 넘어 가기로 하겠다.
어릴 때 이름을 김자수(金自粹)라고 불리운 소년은 글방에서는 재주 좋은 신동으로 이름 났고 집과 이웃에서는 천생 효자(天生孝子)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사람다운 길은 효성이 근본이요, 효자의 집에서만 충신이 난다」
마음에서의 효성이 극진했던 어린 자수가 의식적으로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려고 결심한 것은 글방에서 효경(孝經)을 배우다가 이런 대목에 감동한 때부터였다. 

12_1.jpg


「나는 남의 두 배 효도를 어머니한테 해야 한다」
소년 때부터 그런 결심을 한 자수는 자기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어머니가 홀로 고생하는 과부였기 때문이었다.
삼삼부사(三司副使)를 지낸 조부 영백(英伯)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고 예부부사지제고(禮部副使知製誥)였던 부친 오통(?通)에 대해서 그 예법 높은 근엄한 인상만이 평생의 가훈으로 영향을 주었다.
예부의 지제고라는 벼슬의 직책은 왕의 칙서(勅書)를 기안하는 고
급 비서관 격이었다. 왕에 대해서도 기탄 없이 그 잘못을 간고(諫告)하는 권한과 직책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자수의 부친 오통은 특히 왕에게 준엄한 이론으로 잘못을 추궁하는 충용으로도 부패한 관리들을 겁내게 했으며 그 때문에 정적(政敵)들의 미움도 많이 샀던 것이다.
자수가 나중에 왕의 측근에서 가혹하리만큼 왕의 잘못을 들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간관(諫官)의 직책을 완수한 것도 부친의 기질을 이어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은 공(公)에서나 사(私)에서나 거짓이 없이 정직해야 한다. 거짓을 하긴 쉽고 정직하긴 어렵다. 부모에게서 거짓이 없으면 자연 효도가 되고, 임금에게 거짓이 없으면 자연 충신이 된다」
이런 부친의 공훈을 어려서 받은 자수는 이 유훈을 실행하는 것이 부친의 영혼에 대한 효도요, 홀어머니에 대한 효도라고 알았으며 그것이 거의 천성처럼 습관화하였다.
「우리 경주 김씨(慶州金氏) 문중에 효자 났다」
종중에서는 소년 자수의 효성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 당시에 거짓 없는 진짜 효자는 나라에서도 민간에서도 가장 존경하고 우대하는 인격의 상징이었다.

12_2.jpg상촌선생 효자비각

「네가 나한테 대하듯이 장차 커서 임금에 대하면 충신이 될 것이요, 그런 지성으로 세상 사람을 대하면 군자의 경존을 받을 것이다」
부친 없는 외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모친의 속마음은 오히려 칭찬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도 모친의 옆을 떠나지 않고 했다. 그것은 모친의 잔심부름까지 때를 잃지 않고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넌 왜 어린애처럼 내 곁에만 붙어 있느냐? 모든 시간을 네 공부에 써도 모자랄텐데, 내 시중하느라고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 암만해도 내가 빨리 죽든지 머릴 깎고 중이라도 돼야지 내가 집에 있다가는 네가 공부를 못하겠구나!」
모친은 자기에게 너무 지극한 아들의 효성을 도리어 걱정했다.
「자식은 부모에겐 늙기까지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그런 웃음의 말도 했지만 그것은 응석이나 보채기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모친의 손발이 대신 되기 위한 정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친이 걱정하던 그의 공부는 천품과 노력의 공으로 날로 대성해 갔다.
청년 문장으로 자부하게 된 자수는 공민왕(恭愍王) 23년 4월에 진사(進士)시험에 응했는데 왕이 친히 뽑아서 급제시킨 33명의 젊은 인재 가운데는 특히 자수의 이름이 빛났었다.
그 뒤 공양왕(恭讓王) 2년 봄에는 성균관(成均館) 제주(祭主)로 있다가 세자시학(世子侍學)이 되었는데 이때까지의 벼슬은 많은 문장과 도덕의 학자적 성질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공양왕 4년에 좌상시(左常侍)가 된 뒤부터 우왕(禑王) 때의 정언(正言)을 거쳐 고려 말기의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정치생활을 했었다.

자수가 관계에서 높은 정언(正言)에 있을 때도 모친을 모신 집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한낱 어린애로 돌아가서 어렸을 때부터의 효도로 그 어머니를 봉양했다.
늙은 뒤로 잠을 늦게 자는 모친이 잠들 때까지는 극진히 업고 아침에 출근했던 조복(朝服)의 띠를 풀지 않고 사사로운 기거 동작까지 삼갔다.
그렇게 봉양하던 모친이 별세하자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모친 산
소 옆에 지은 묘막에서만 6년상을 입었다.
그 동안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거의 단식제(斷食祭)를 계속하다시피 삼년 동안 된밥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멀건 죽 한 그릇씩을 겨우 조석으로 두 번 취할 뿐이었다.
그 단식기도와 같은 효자가 조석으로 모친 묘전에서 슬피 통곡하
는 수척한 모습은 지나던 행객과 나무꾼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런 효성의 영장(靈場)으로 이름이 높아진 묘막을 위문한 친구 남을진(南乙珍)은 다음과 같이 시한수를 옲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견거려자(來見居廬子)
고전비례명(苦前飛禮明)
순생성의절(筍生誠意切)
백고효심경(柏苦孝心傾)
묘막사는 자네를 찾아보니 엎드려 있는 
거적자리 앞엔 제사 범절이 분명하네
자네 정성으로 땅에선 곧은 대순이 솟아 있고 
송백 나무 가지들도 효성에 귀 기울여 꾸부러져 있네

이렇게 지극한 효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지자 자수의 집에 효자 정행(?幸)을 달아 주어서 가문을 빛내게 했다.

왕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유명한 화가(畵家) 용면(龍眠)에게 묘막을 나오는 그림〔出居廬之圖〕을 제작케 해서『동국삼강사실록(東國三綱事實錄)』싣고 역사적인 귀감으로 삼았다.
자수와 목은(牧隱)과의 우정(友情)은 각별했다.
자수는 자기의 이름 자수(自粹)와 자 순중(純仲)에 대해서 항상 자랑했다. 그와 목은 이색 사이에 행하여진 그의 이름 풀이 문답
은 유명한 문헌으로 남게되었다. 목은은 상촌(桑村)의 선배였으나 목은 후배인 상촌을 친구로 사귀었다.
「이름 자수(自粹)라 함은 스스로 근면복응(勤勉服應)하려는 뜻이요, 자 순중(純仲)이라 함은 강건중정(剛健中正)의 뜻입니다. 이름과 자를 합해서 순수(純粹)가 되는데 순수는 정건(精乾)의 덕을 의하오. 문왕(文王)의 덕도 요컨대 정건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자랑에 대한 목은의 대답은 우정에 넘치는 흥미 있는 해명(解名)이었다.
「선비는 현(賢)하기를 바라고 현한 뒤엔 잘하기를 바라며 성한 뒤엔 천(天) 되기를 원하는 법인데 당신은 이름인 자수(自粹)와 자인 순중(純仲)으로서 그것을 자부하는군요. 일반의 말에도 군자는 자강불식(自强不息)한다고 하지 않소. 자강하면 굽히지 않고 불요(不撓) 불식하면 폐하지 않소. 불경(不慶)자강불식(自强不息)
하고 불요불경(不撓不慶)하면 극(極)에 달합니다. 극은 바로 천(天)이 되는 것이오」
목은이 이런 해명까지 해서 축복해 준 것은 단순한 글자 풀이가 아니고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에 정언(正言) 이라는 현관(縣官)에 있으면서 갑인(甲寅)의 청년 준재들에 끼어서 응시하고 명예의 장원에 급제한 그 순수한 향학심과 근면 수양하는 인격에 감격했기 때문이었다.
자수가 장원을 했을 때 이색은 여간 감격하지 않았다. 자수의 스승이었던 염동정(廉東亭)이 제자의 집을 축하하려고 가는 길에 목

은의 집에 들러서 같이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때 마침 병석에 누워 있던 목은은,「내가 지금 병중이라 염선생과 함께 못 가는 것이 유감입니다. 그 대신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축하의 시 한수를 지어서 전하리라」하고 목은은 병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지었다.

사위성사족경세(斯爲盛事足警世)
여한병체난출문(與恨病體難出門)
취산각동평여수(聚散却同?輿水)
한망여합주영부(閒忙與合酒盈樽)
사지조적지하일(四支調適知何日)
풍우소소독대헌(風雨蕭蕭獨侍軒)
세상이 다 놀라는 이런 경사에 
축하 못 가는 이 몸의 병이 한이라구나. 
인생의 모였다 헤졌다 함이
부평초와 물과 같듯이
즐겁고 고달픔을 그만 술잔에 맡기는 세상이어라 
아아 내 몸이 언제 쾌차해서
그대와 함께 소요하리오.
비바람 소리 쓸쓸한 집에 홀로 누어 있네

목은은 빨리 자유로운 몸으로 쾌차해서 자수와 더불어 송악산에도 다니며 서로 믿는 우정으로 천하를 탄식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가보지 못하고 글로만 축하하면서 일찍이 상촌과 포은과 더불어 송악산에 올라가 놀았을 때에 상촌이 읊었던 비통한 시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상촌의 시는 그의 문장(文章)과 더불어 애국충절의 지성이 애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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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춘풍건마춘산객(春風蹇馬春山客)
마보지래만수음(馬步遲來萬樹陰)
간반림심무괴석(澗畔林深無怪石)
장애화락총신금(崎崖花落摠新禽)
삼배주기론금일(三盃酒氣論今日)
일곡송성보고금(一曲松聲報古琴)
고국창망여작사(故國蒼芒如昨事)

충신열사공쟁음(忠臣烈士共爭吟)

봄바람에 말을 타고 산 구경을 왔건만
말도 느릿느릿 걸으며 숲속에서 졸으려고 하네
개울가의 깊은 숲엔 바위도 없이 그윽만 한데
저편 절벽에는 꽃이 져서 울리는구나 
석잔 술에 흥분해서 세상사를 탄식하면
한 곡조 소나무 바람 소리가 옛날 거문고를 울리는구나
아아 아득한 역사가 어제 일과 같아서 
충신 열사들이 슬픈 회포를 읊어 마지아니함이라

목은은 상촌이 일찍이 고려 조정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 가던 것을 한탄하면서 그 운명과 더불어 고달파하는 왕을 동정한 상촌의 다음의 애국시도 생각이 났다.

충신열사금안재(忠臣烈士今安在)
비거산금어고춘(飛去山禽語古春)
옥계화심풍후로(玉階花心風候老)
금릉수색우중빈(金陵樹色雨中貧)

응지일단청향각(應知日短淸香閣)
상필천한관덕인(想必天寒觀德人)
감루진의대상객(感淚振衣臺上客)
차시기읍아왕신(此時幾泣我王身)

충신 열사들은 어디가 있는고
날아가는 산새만이 옛봄을 그리워하네.
대궐안 뜰의 꽃도 모진 비람에 다 늙었고
임금님 사랑하시던 나무도 빛도 우중에 초라하다
아아 날이 이미 기운 이 추운 청향각에서
오직 그리운 것은 나라 구할 충신의 덕이로구나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씻고
고궁의 섬돌에선 누가
가엾은 임금의 몸을 울어 위로할건고

이런 상촌의 비가(悲歌)는 이미 고려의 장래가 망할 징조를 미리 느끼고 그것을 구원할 충신들의 힘이 부족한 현실을 탄식한 고충이었다.
이색도 정몽주도 그런 징조를 느끼고 비통히 여기던 회포를 상촌의 이 시가 여실히 읊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와도 깊은 우정으로 사귀었으며 항상 기울어 가는 나라의 운명을 조심했다.
「만일 나라가 망하면 우리들은 새 나라엔 따라가지 않을 터이니 새로운 권력에 잡혀 죽든지 자결하든지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지」
이미 무장 이성계가 나라의 실권을 잡다시피 하자 뜻 있는 충신들은 소극적이나마 깨끗한 충절을 지키려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잠시 서울(송도)을 떠나서 짧은 여행을 했을 때에도 상촌에게 시를 읊어 보내는 우정도 잊지 않았다.
그 시 가운데서 봄날의 수심은 짙은 술과 같고 세상 인정은 점점 야박해 진다는 단장(斷腸)의 회포를 고백한 것도 고려가 망할 징조를 탄식한 것이었다.

문소군루가처(聞韶郡樓佳處)
피우래등일사(避雨來登日斜)
초색청연역로(草色靑連驛路)
도화란복인가(桃花亂覆人家)
춘수정롱사주(春愁正濃似酒)
세미점박여사(世味漸薄如紗)
장단강남행객(腸斷江南行客)
건려향래화(蹇驢向來華)
소군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비오고 난 날 
해질 무렵에 올라 보았다.
풀빛은 푸르게 길에 우거지고 
복사꽃은 붉게 집을 덮었다.
봄날의 수심은 짙기가 숲과 같고 
세상 인심은 엷기가 황라 비단과 같다.
슬픈 회포로 남행하던 나그네는 
비틀거리는 노새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온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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