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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村의 殉節과 節義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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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2-27 11:20 조회1,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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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村의 殉節과 節義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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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충신 상촌 김자수 선생 순절비

 

상촌의 척불론과 개혁적 시무론의 이념적 토대와 정치노선의 배경에는 당시 고려 말 사회에서 불교의 대안으로 정착되고 있던 주자학과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던 신진사류들의 개혁사상에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고려 말 주자학이 유입된 것은 1290년 충렬왕 중엽의 일로서, 안향(安珦, 호 晦軒, 1243~1306)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백이정(호 彛齋, 1260~1340), 최해(崔瀣, 호 拙翁, 1287~1340), 최문도(崔文度, 호 春軒, 1291~1341), 권보(權溥, 1262~1346, 안향의 문인으로『四書集註』간행), 우탁(禹倬, 호 易東, 1263~1342) 등에 의하여 뿌리가 내려 학문적 연구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이색(1328~1396), 정몽주(1337~1392), 이숭인(1347~1392) 등에 의해 꽃이 피고, 김자수(1361~1413), 권근(1352~1409), 이집(1314~1387), 황희(1363~1452), 길재(吉再, 호 冶隱, 1353~1419) 등에 의해 학문적사상적 결실이 맺어졌다. 특히 고려 말 성리학 정착기에 제3세대라고 할 수 있는 김자수 등은 학문, 사상, 예론, 정교(政敎)면에서 성리학의 특성으로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유교윤리를 확립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이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상촌이 성균대사성으로 불교와 무속(巫俗)에 대한 배척, 왕실과 관리들의 부조리한 기강, 윤리의 쇄신을 강조하며 개혁적 시무론을 편 것 등은 모두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사상과 유교윤리에 그 기반을 둔 것이었다. 유교의 경우, 원시유학이 주로 효제충신(孝弟忠信) 등 윤리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송대의 성리학은 원시유학의 심성도덕(心性道德)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한층 강고하게 제고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에서 탐구하는 이른바 궁리진성(窮理眞性)의 학문이었기 때문에, 자연 종교와 의례면에서 불교와 양립할 수 없는 상충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고려 말 사회에서 불교는 지도이념이나 윤리면에서 많은 폐해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성리학을 체득한 일군의 신진사류들이 성리학사상과 유교적 통치윤리에 의해 새로운 고려로 소생시키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은 물론 학문, 문화, 풍속 등 각 분야에 걸쳐 ‘혁구종신(革舊從新)’의 일대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상촌은 고려 말 성리학이 도입된 후 그 학문과 정신을 체득한 제3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관료로서 기우는 국운을 유교적 개혁으로서 붙들어 되돌리고 바로 세우기 위해 온건개혁론자로서의 온갖 경륜을 건의하는 등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등 급진적인 혁명노선의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들이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시점에서, 1392년(공양왕 4) 4월 온건개혁론자로서 절의파 신진사류의 지도자 포은이 격살(擊殺)되고, 그 해 6월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41세의 상촌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어 허물어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위해 최후까지 헌신하게 되었다.

 

상촌은 19세 때 성균관에 수학한 이래 이색,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업하고 관료생활을 해오는 동안에도 그들과 학문적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거의 같이하면서 계속 사우(師友)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문익점, 남을진, 길재, 조계생(趙啓生), 김진양(金震陽, 호 草廬, ?~1392), 이문화(李文和, 호 烏川, 1358~1414) 등 주로 절의파 인물들과의 교우가 특히 깊었다. 그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이색,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의 노선을 따라 이성계, 정도전, 하윤(河崙, 호 浩亭, 1347~1416), 조준(趙浚, 호, 齋, 1346~1405) 등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역성혁명파, 곧 개국파와는 노선을 달리하고, 정면으로 대치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것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소박한 유교윤리를 지키려는 신념에서 연유한다기보다는, 성리학이 갖고 있는 의리지학으로서의 본질적인 특성과 이념, 그리고 정치, 사회윤리의 척도로서 주자학적 예론의 준법(遵法)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상촌은 고려왕조에 대해 시종일관 의리를 지키는 대표적인 절의파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하였다.

 

1392년(공양왕 4) 7월 급진 역성혁명파 세력은 신흥 무장세력인 이성계를 추대,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때 상촌을 비롯한 이른바 두문동(杜門洞) 72현으로 불리는 일군의 온건개혁파 세력들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에 반대, ‘애국충군(愛國忠君)’,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며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로부터 등을 돌렸다. 여말선초에 현실을 우선시하는 급진적 혁명세력인 사공파(事功派)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해서 이상적 지치(至治)를 실현하려는 온건개혁세력인 절의파(節義派)의 대립, 갈등은, 한국의 성리학이 성립, 정착되고, 또 향후 유자(儒者)가 지향해야 할 학문, 사상의 목표 문제와 관련하여 큰 분기점을 이루었다.

 

정몽주, 김자수, 길재를 비롯한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온건개혁파와 이방원(李芳遠), 정도전 등 급진혁명파와의 대립투쟁은 마침내 현실지향적인 혁명파의 승리로 끝났다. 개혁파의 주도자인 정몽주는 새 왕조의 건국 3개월 전인 그 해 4월 혁명파의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고, 상촌을 비롯한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고려 충신들은 개국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유배 또는 희생되거나 절의를 지켜 은거의 길을 택하였다. 이때 조선 건국 후 상촌은 유신으로서 고려에 대한 충의와 지절(志節)을 지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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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낙향 후 만년에 그는 새 왕조의 참여를 거절한 채 어느 늦가을에 개성 고려 태조의 능을 참배하고, 송악산(松岳山)을 찾아 사라져버린 옛 왕조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광덕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상촌을 비롯해 절의유신 72현이 살았던 부조현(不朝峴)에 올라 역사의 흥망에 대한 감회와 고려에 대한 절절한 충절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상촌실록』에 전하는「배알송경태조능(拜謁松京太祖陵)」, 「송악산제영(松岳山題詠)」, 「부조현자영(不朝峴自?)」등의 시편이 그것인데, 고려 충신으로서 상촌의 절의정신과, 시대와 세상 인심의 변화에 대한 상촌의 감회가 그대로 잘 나타나 있다.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滿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시냇가의 숲은 깊이나 괴이한 돌은 없고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

석 잔 술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한 곡조 소나무 소리는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 주네.

고국(故國)은 아스라이 어제의 일과 같고

충신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국역)

 

아마도 이 시편은 절의를 지켜온 옛 고려 유신 몇 사람이 어느 날 개성 송악산에서 만나 시회(詩會)를 연 듯하며, 여기에서 “고국은 아스라이 어제 일과 같고, 충신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라는 표현은, 조선이 건국한 지 오래도록 충절을 지키며 사는 충신들의 망국의 한(恨)을 은연 중 토로한 것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옛 고려 왕조와 임금을 추모하면서 아직도 비분(悲憤)을 삭이지 못하는 상촌의 강개(慷慨)하는 모습은 다음의 시편 속에 더욱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충신과 열사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빛 바랬네.

알지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터이고

필시 관덕(觀德)사람들에게도 날씨는 차가웠었으리라.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에 눈물을 떨구는도다.

이때를 당해 우리 임금 생각하고 몇 번이나 울었던가.(국역)

 

이 시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새 왕조의 참여와 녹(祿)을 거절한 두문동 72현의 충절이 깃든 폐허화된 옛터에서 자신도 한때 그 일원으로 추위 속에 몸을 떨며 살던 지난 옛일과 현재의 감회를 읊은 것이다.

고려에 대한 충의와 지절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의 고초를 겪은 사람들, 또 조선이 건국한 지 한참 뒤인 지금까지도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사람들, 유명(幽明)을 달리하거나 유망(流亡)처럼 뿔뿔이 흩어진 고려 왕조에서 일하던 관료들, 더욱이 비운의 최후를 마친 공양왕과 전조(前朝)의 임금들을 생각하며, 상촌은 깊은 감회와 강개 속에 감루(感淚)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 속에는 고려 왕조의 영화로 상징되는 ‘옛봄(古春), 옥계, 금릉, 청향각, 임금’ 등이 모두 빛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된 현실과 대비, 옛 왕조에 대한 상촌의 변함없는 충절과 충의지신으로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의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상촌의 옛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의 향심(向心)은 개경 태조의 능을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데서도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덕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뒤의 일이지만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습니까.

진령,『시경』에 어진 신하가 임금을 기리며 읊은 시)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해바라기는 봄부터 피어 있구려.

풍운(風雲)의 눈물 수없이 흘리면서

진세(塵世)의 겁회(劫灰, 兵火로 타고 남은 재)를 밟아왔다오.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드리오니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국역)

 

이때 상촌은 고려왕조를 창업한 왕건(王建) 태조의 능을 찾아 세월의 전변(轉變) 속에서 500년의 고려의 사직(社稷)과 지난 역사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안동 향촌에 은거하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닦는 야인(野人)이자 도학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면서, “덕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뒤의 일이지만 신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습니까” 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과 애정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고려 말 망국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풍운의 눈물을 수없이 흘리면서” 온갖 풍상(風霜)과 고초를 다 겪고 살아온 자신과 절의파 인사들의 처지를 드뇌이면서, “능침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북두의 그림자가 배호하네.”라고 고려 유신으로서 깊은 망국의 비감(悲感)과 현실의 감회를 완곡히 토로하였다.

의의 시편들 속에는 만년의 상촌이 20대 이후 4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수학(修學)과 관직생활을 보낸 개경을 찾아, 고려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충의지심과 절의 태도가 진솔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 시편에 나타난 충절을 통해서도 상촌이 조선왕조에 사환(仕宦)했다는 일련의 기록이 조선왕조의 개국세력에 의해 조작된 허구의 기록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은거하던 상촌은 향리에서 농사를 돌보면서 독서와 수학, 그리고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와 함께 살아 남은 절의파 인사들과의 교우로 만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새로 창업한 조선왕조가 태종대에 이르자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고려 충신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과 예우책이 마련되는데, 그것은 태종 원년 권근의 구언상서(求言上書)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권근은 이 상소에서 “대업이 이미 이루어져 수성(守成)할 때에는 반드시 전대의 절의를 다한 신하에게 상을 주어 후세의 인신(人臣)의 절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 이후 이를 수용한 태종은 고려 충신인 정몽주, 길재, 김약항(金若恒, ?~1397) 등을 절의지사(節義之士)로 포상, 추증하였다. 이밖에도 두문동 72현으로 상징되는 고려의 절의파 인사들의 충성과 의리에 명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회유, 정권에 적극 차여시키려 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고려 말 절의파의 대표적인 관료이자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상촌에 대한 각별한 예우와 함께 사환(仕宦)을 직, 간접적으로 적극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상촌에 대한 일련의 움직임은 아마도 고려 말 성균관 수학시대 이래 관료로 함께 활동하며, 상촌의 강직한 지절(志節)을 잘 알고 존경하던 권근 등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아무튼 태종 즉위 후 태종은 세 차례나 신하를 보내 상촌의 출사(出仕)를 적극 종용 하였다. 그러나 절의를 숭상하는 성리학의 이념과 예론의 실천에 철저했던 상촌의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의리, 특히 ‘신불사이군’의 유교학인으로서의 신념을 꺾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태종은 세 번째로 상촌에게 형조판서를 제수하고 이를 받들기를 요구하면서, 불응할 경우 중죄로 벌할 것을 위협하였다. 이에 상촌은 자손에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신하로 나라가 망하면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로 스스로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

 

하고 경기도 광주 추령(秋嶺, 현 오포면 신현리)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내 평생에 바친 충효의 뜻을 오늘 뉘 있어 알리요

내 한번 죽음 한하지는 않나니

저승의 구원에는 알아줄 이 있으리라.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 一死吾休恨 九原應有知)

 

상촌의 비장한 순절(殉節)은, 일생동안 고결한 인품으로 의리지학으로서 성리학의 정명사상을 탐구 실천해온 유학자이자 고려의 유신으로서 택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절의의 실천이자 최후의 저항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상촌의 묘가 있는 광주 추령에서 얼마 멀지 않은 용인 모현면에는 상촌이 생전에 사우(師友)로서 존경하던 정몽주의 묘가 위치해 있어서 두 사람은 죽어서도 충의의 상징처럼 이웃하게 되었다.

 

상촌의 자결 소식을 들은 후학 황희는 평소에 존경하던 상촌의 만사(輓詞)를 지어 스승의 순절을 조상하였다.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하물며 살신성인의 어려움까지 얻으셨네.

(有忠有孝難 有孝有忠難 二者旣云得 況又殺身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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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 황희가 87세의 나이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곳

 

상촌의 최후를 충절과 효행, 살신성인으로 애도한 황희는 고려 말 상촌이 성균대사성으로 유학교육을 총괄할 때 성균학록(成均學錄)으로 재직했던 후학이며, 조선왕조에 출사하여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까지 오른 현달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상촌의 행적을 잘 알고 있던 그가 순절 직후 상촌을 충효대절의 상징으로 찬양한 것은, 이 역시 상촌이 조선왕조에서 벼슬했다는 일부 관찬기록이 조작과 오류임을 명확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무튼 여말선초에 상촌이 보여준 성리학적 이념과 예론, 실천적인 절의정신은 당대는 물론 16세기 이후에 대두된 조선중기 사림파(士林派)와 그 후손들에게 크게 주목되어, 의리지학을 중시하는 조선 성리학의 특성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포은, 상촌, 목은 등의 절의와 학풍은 조선 성리학의 기본정신으로 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각 역사시기마다 이상과 정의의 입장에서, 학문은 물론 국가와 사회가 위태롭거나 불의와 부조리한 현상을 드러낼 때마다 이를 견제 비판하는 정신사적 전통으로 작용하는 데 그 연원을 이루었다.

 

이 글은 2004년 11월 1일 개최된 상촌사상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최홍규박사의 논문 ‘桑村 金自粹의 忠孝思想과 그 脈'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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